GEAS
페리의 기억은 닳아간다. 어제의 하늘도, 아침에 마주친 얼굴도,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그 무너져 내리는 기억의 잔해 위에 로칸의 생명이 매달려 있다.
잊히는 것이 곧 죽음이라면, 그는 짙어져가는 안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여야 한다.
존재의 기아스 망각과 생존 기억의 닻
로칸
로칸 Lorcan
192cm 92kg 22세 파괴자 의장 아블라흐
페리
페리 Ferry
198cm 112kg 20세 수호자 집행자 아블라흐
1
오쿠르 323년
이름 모를 선물들
기억을 잃은 채 떠돌던 페리에게, 어떤 마을에 닿든 선물이 도착했다. 상선부터 인형, 약초까지. 보낸 이의 이름은 언제나 ─ '로칸'.
2
오쿠르 323년
아블라흐의 의장님
영광스러운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는 사도들의 터전, 아블라흐. 두번째 고향에 돌아온 페리는 선물의 출처를 쫓아 향한다. 그곳은 다름아닌··· 의장실?
아블라흐의 의장인 로칸은 페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는 듯 편하게 대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페리 뿐. 새로운 기억의 시작은 그 앞에 서게 되며 시작되었다.
3
오쿠르 323년
새로운 직무 보고
로칸의 쏟아지는 애정으로 만들어진 보금자리와, 보란듯이 준비되어 있는 울타리에 들어서길 망설이는 페리. 그의 요청대로 로칸은 하나 조건을 내건다. 일상 보고요? ···아이들이 쓰는 일기장도 아니고.
4
오쿠르 323년
위험한 사제
우려와 달리 순조롭게 이어가던 일상. 그 사이, 로칸의 집무실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5
오쿠르 323년
폭풍우가 다녀간 자리
소란 이후 페리가 며칠째 마주보기를 거부한다. 종이로 대신하는 보고도 벌써 수일째. 연구 허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 로칸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닌 실망이 있었다.
6
오쿠르 323년
로칸이라는 사람
로칸이 행하고자 하는 것들. 미련 없는 행보. 모든 것의 끝에 홀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 망각을 자각한채 내뱉은 말들에, 페리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7
오쿠르 323년
불투명한 거울
로칸이 자리를 비웠다. 전조 따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페리의 불안은 기우였던 듯 며칠 뒤, 드디어 로칸이 돌아왔다.
새로운 아블의 소식에 시끌벅적한 의장실. 집행자 속에 파묻혀 소식을 전해주는 그의 미소 뒤로는 그 많은 인원들이 눈치채지 못한 상처가 가득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고요한 곳에 단 둘이 남자, 로칸이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원망하되 쓸모가 다하면 잊으라니. 페리의 미성숙한 내면을 가르키는 말들이기도 했다.
8
오쿠르 323년
성장의 초석
상처 받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로칸이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모순 속에 나아갈 방법을 찾는 페리와, 이끌어내는 로칸.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로칸이 홀로 사라질 것을 두려워 동행을 요구한다.
9
오쿠르 323년
어지러운 마음
“내가 키스를 토마토랑 했나…….”
10
오쿠르 323년
물결이 일다
평범한 어느날. 하늘은 더없이 맑고. 서류는 세차게 내리는 비처럼 쏟아져내린다.
펜을 내려놓은 로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보고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도, 보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지 않는가?
11
오쿠르 323년
울타리 너머의 세상
끝이 보이지 않는 업무로부터 도망쳐 나온 로칸에게, 페리는 제 고향으로의 짧은 외출을 제안한다.
아블라흐에 와 처음으로 시도한 일탈. 그리폰에 올라탄 두사람이 향한 곳은 ── 인니스 솔루스. 페리의 고향이다.
그가 내어주는 특산품을 먹고, 바다 소금맛 사탕에 속아 얼굴을 찡그려 보기도 하는 이상. 혹은 일상.
12
오쿠르 323년
불편한 보금자리
짐을 챙기려던 페리를 따라 방문하게 된 꽃집. 노부인이 두사람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좋은 분이라는 감상에도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페리에게 로칸이 묻는다. 네가 원하는 걸 듣고 싶은 거야.
13
오쿠르 323년
변해가는 해안
주어진 애정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에서 밀어내던 고향. 남을 수는 없지만, 바라는 보고 싶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칸이 페리를 끌고 밖으로 나선다.
목적지는 리아글라스. 잿빛으로 죽어가던 갯벌에 마력이 흘러들어 형형색색의 산호가 피어나고 있었다. 파견할 탐사단에 함께해주길 바란다며.
로칸은 목적도, 방향도, 페리에게 짜맞추어 답을 내놓았다. 그런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14
오쿠르 323년
노을 위 나룻배
뉘엿뉘엿 오렌지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조각배를 타고 인니스 솔루스로 돌아가는 길. 물 위에 번지는 노을을 헤집으며, 생각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을 나누고 싶다-고.
15
오쿠르 323년
나의, 너의, 우리의 식탁
페리의 집으로 돌아와 맞이한 저녁 식사. 따뜻한 수프, 빵을 나누는 손, 소소한 웃음. 화목한 가정이라는 풍경 한가운데에 로칸이 앉아 있다.
숟가락을 드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러한 광경을 본 적이, ···있나? 영문 모를 기시감이 내내 가시질 않더니, 아블라흐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마침내 쏟아졌다.
말발굽 소리. 창 너머로 스쳐가는 거리. 어딘가를 향하던 상단의 행렬 ── 크레아그 반. 신에 의해 봉인된 원죄의 기억이 넘실거린다.